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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전자공학과 감성 문학] 공감은 곧 이해다 - 블로그를 시작하는 이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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타인에 대한 공감은 현대 사회에서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.
기술의 발전에 따라 사람들은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기보다는 댓글이나 커뮤니티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소통하는 경우가 많아졌고, 편리함을 대가로 사람들 마음의 문이 닫힌 것 같다.
범죄 사건에 대한 여론을 보면 합리성이라는 가면에 숨어 감수성을 잃은 듯한 반응이 자주 보인다.
나는 이를 이해력의 부족에서 야기된다고 생각한다.
 

공감은 곧 이해

가령 공공장소에서 대화하며 소리를 마구 지르시는 어르신을 생각해보자.
이때 주변인이 취할 수 있는 반응을 살펴보자.
 
① '짜증나. 시끄러. 공공장소에서 왜 저런데?'
→ 현대 사회에서 정상적이라고 본다. 왜냐고? 본인이 불편하니까.
끊임없는 기술의 발전은 나의 불편함을 해결해주는 방향으로 진보되었다.
고로 우리의 몸은 불편을 참을 수 없는 형태로 진화되고 있는 것이다.
 
② '청력이 저하되어 말을 크게 해야 상대방에게 전달된다고 생각하시나 보구나.'
→ 높은 이해력을 바탕으로 상대방에게 공감하고 있다.
 
③ '(신경 안씀)'
→ 정상. 내 알바가 아니니까. 개인주의적인 성향은 내 기준 비난의 대상은 아니다.
 
내 관점에서는 두 번째 반응이 나타나는 사람이 가장 이해력이 좋은 사람이고, 타인의 입장에 잘 공감하는 사람이다.
사고나 관점의 폭이 넓고 사회적으로 이상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.
그리고 이 둘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. 이해가 되는 순간 공감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.
반대로 말하면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에서 화가 나고 공감이 되지 않는다.
따라서 화가 날 때, 그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보자.
상황에 대한 이해력과 비례하여 성질이 죽는 것을 느낄 것이다.
 
...
 
물론 나도 위와 같은 상황에서 두 번째 반응이 항상 나오진 않는다.
다만 저런 반응이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.
왜냐고? 내 기호가 그렇다.
짬뽕과 짜장면 중 짬뽕을 고르는 것 처럼 그냥 내가 저런 방향성을 원한다.
 

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

대학 시절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을 때면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.
단순히 어려운 개념을 처음 접하는 것도 원인이었지만,
교수님들의 설명 방식이 내게 잘 와닿지 않아서가 컸던 것 같다.
교수님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.
(아닌 분들도 아주아주 많았다.)
억울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는데, 그 당시 내 논리는 이랬다.
 
'고등학교보다 훨씬 더 많은 등록금을 내고 배우는데 그 똑똑한 교수님들은 나를 이해시켜주지 못하는거야 !'
 
그 해답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알게되었다. 하지만 오늘 하고싶은 이야기는 아니다. 넘어간다.
 
주위를 둘러보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지닌 학생들이 자주보였다.
이들에게 공감할 수 있는 지식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공부가 좀 더 재밌고 효율적으로 다가올텐데.
그래서 뭣도 아닌 내가 그들에게 공감해주는 사람이 되어보기로 했다.
 

블로그를 시작하며

공학이라는 분야를 공감하기 쉬운 분야로 바꾸기 위해선 영향력이 필요했다.
방 안에서 소리치는 아우성은 소음에 불구하니까.
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었고, 우선적으로 선택한 플랫폼이 이 티스토리 블로그이다.
 

'공감공학' 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전자공학적 개념을 쉽고 명쾌하게 풀어,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지식으로 전달한다.

이를 모토로 블로그를 시작해본다. 더 많은 사람들이 공학 지식을 쉽게 접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.
내 포스팅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그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한다.
조금 더 예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면 나 역시 기쁠테니까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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